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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세 마리

[1학년 1학기] 토론 수업 종강 소감 본문

감상

[1학년 1학기] 토론 수업 종강 소감

최루범 2023. 2. 6. 21:14

4번째 토론 주제 <인간은 인공지능을 제어할 것인가 인공지능에 지배당할 것인가>는 인공지능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토론이었다. 인공지능은 작년 알파고 대 이세돌 대국으로 큰 이슈가 되었지만, 몇 개월 지속되지 못하고 그 열기가 빠르고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 당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앞으로 등장하게 될 인공지능에 대해 호기심과 두려움을 모두 느꼈지만 거기서 그칠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4번째 토론은 인공지능에 대한 위기심을 크게 일깨워 주었다. 인공지능이 약인공지능에서 강인공지능, 나아가 초인공지능까지 발전할 수 있음이 그다지 먼 미래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과, 인공지능의 지능수준 또한 인간을 넘어선다는 새로운 정보는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약인공지능에만 익숙해 있던 나에게 막대한 공포심을 주었다. 이는 인공지능에 대한 무조건적인 혐오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인공지능이 앞으로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동안의 안일함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었다. 인공지능이 자율성을 갖든 자의식을 갖든 인공지능의 행동과 그 방향성이 인간에게 꼭 이득이 되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이 갖고 있는 파괴력은 크기에, 어쩌면 인공지능 하나의 작은 오류가 인류에게 종말을 고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인공지능에 대한 토론은 편리함만을 추구하며 그 속에 안일해 있던 나에게 인공지능에 대한 인식을 일깨워주는 토론이었다.

2번째 토론 <슬로터다이크의 포스트 휴머니즘, 인간 해방인가 인간 사육인가>을 어려운 주제로 꼽을 수 있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슬로터다이크라는 철학자는 철학과 거리가 먼 나에게 생소한 이름이었다. 둘째, 첫 번째 이유와 같은 맥락에서 나는 슬로터다이크가 제시한 철학과 생명과학을 결합시킨 새로운 윤리 패러다임인 포스트 휴머니즘에 대해 무지했고, 이를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포스트 휴머니즘에 대한 평가를 인간 사육과 인간 해방,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일도 어려웠다. , 텍스트상의 용어 해석뿐만 아니라 그 내용을 이해하고 평가해야하는 것까지 처음부터 끝까지가 어려웠던 토론이었다. 그래도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여러 논문과 서적들을 참고하여 빠른 시간 내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포스트 휴머니즘에 대한 평가는 매우 어려웠다. 우선 포스트 휴머니즘의 주체인 '인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가 무척 어려웠다. 인간은 정해진 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생명체에 정확한 정의와 특징을 정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기존의 휴머니즘이 인간 개선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기존의 휴머니즘이 제시한 인간상도, 슬로터다이크가 제시한 인간상도 모두 맞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휴머니즘이나 슬로터다이크의 포스트 휴머니즘이나 인간 개선이라는 같은 목적으로 두고 다른 방식을 제시하지만, 그 방식이 완전히 상반된 것은 아니기에 어려움을 주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 토론을 하면서 '인간 개선'이라는 것이 철학적인 관점뿐만 아니라 생명과학적인 관점에서도 생각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슬로터다이크의 주장 중 너무 지나친 유전자에 대한 의존은 피해야 하겠지만, 슬로터다이크가 제시한 냉소주의와 견유주의는 나에게 비판의식을 일깨워주었던 점에서 좋았던 주제였다.

추천하고픈 주제는 <작가에 대한 평가는 작품 자체로 이루어져야 하는 가>이다. 지금까지의 많은 작가들에 대한 평가는 그 작가가 쓴 작품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어쩌면 이는 당연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작가들이 이러한 문학적 권위를 좋지 않은 행동에 이용할 수 있다는 점과, 이미 사회적으로 관용되지 못할 행동을 저지른 작가들의 작품이 과연 정상적으로 외부에 실릴 수 있을지에 대한 점에서 의문이 든다. 과거 박남철 시인 사건에도 이러한 사안은 언급되었지만 크게 이슈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박진성, 배용제 시인 사건이 터졌고, 이는 묻혀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따라서 <작가에 대한 평가는 작품 자체로 이루어져야 한다.>를 추천한다. 여기서 말하는 작가는 현재 이 시대의 문학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을 포함하여 한국의 모든 현대시인을 일컫는다.

사실 나는 토론과 거리가 무척 먼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배워왔던 교과과정에 토론 수업은 존재하지 않았고, 참여할만한 마땅한 토론대회마저 몇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수업은 좋은 경험이 되었다. 이 수업을 통해 토론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것들도 배웠지만, 가장 의미 있던 것은 내가 직접 관심을 두지 않으면 평생 생소했을 주제들을 여러 관점에서 해석해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는 토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더욱 잘 느낄 수 있었다. 먼저 토론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을 얘기해보자면, 그 중 제일은 토론의 논의범위를 어떻게 정해야 할 것 인가였다. 토론을 준비하기 전에 논의범위를 만만하게 봤는데, 막상 토론을 끝내기 직전까지 논의범위는 골치 아팠던 부분이었다. 사설분석과 다르게 토론은 상대 조가 존재하기 때문에 상대 조와의 논의범위가 다르거나 주제에 대한 서로의 이해가 다르면 토론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범위의 중요성을 강렬히 느꼈던 토론은 바로 슬로터다이크 토론이었다. 주제에 대해 찬성 측 조는 인간 윤리적 관점에 초점을 맞춘 반면, 반대 측 조는 생명 윤리적인 관점에 초점을 두었다. 그 결과로 각 조가 토론을 위해 열심히 준비한 만큼의 좋은 토론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주제를 분석하는 것에 많은 시간을 들였던 것 같다.

또한 본격적인 토론시간 전에 배웠던 연역, 귀납의 논리구조도 인상 깊다. 토론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내용은 내가 나서서 찾아 배우지 않는 이상 딱히 마주할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내용은 한 번에 이해하기에 어려웠지만, 이를 사설분석에 응용하면서 점차 익숙해 질 수 있었다. 여러모로 이 수업은 전체적으로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 없었다. 그 과정은 결코 쉬웠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그만큼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었던 수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