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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세 마리

'논어로 여는 아침_김훈종' 을 읽고 본문

감상

'논어로 여는 아침_김훈종' 을 읽고

최루범 2023. 3. 17. 12:15

 

출처: yes24


  대학 3학년 때 전공으로 논어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경제, 정치보다 그저 무난한 게 고전이겠거니 해서 택했던 것이었지만, 막상 수업을 들으니 그 몰입감이 상상이상이었다. 교수님은 논어 하나하나를 재밌게 풀이해 주셨다. 때로는 논어 구절을 통째로 외우게도 하고, 비평문 혹은 감상문을 써오라고도 하셨지만, 결국 이를 통해서라도 학생들이 스스로 무언가를 깨우치길 바랐셨던 것이다.

  나 역시 느낀 것이 많았다. 특히 대학 3학년인 2019년은 세대 갈등이니 젠더 갈등이니 하는 갈등이 만연해있던 시기였다. 하여 '유교'라는 것은 성별, 연령 간의 위계질서를 고착화하여 맹목적인 문화를 만들어낸 골칫덩이라는 의견을 곳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가치관을 정립하기에 어렸던 나 역시, 그러한 의견을 경청하며 그럴듯하다고 맞장구쳤었던 듯하다. 그러나 어리기도 했지만 무척 어리석었던 나는. 논어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있기는 했는가?

나는 처음에 논어가 하나의 도덕 기준을 세워놓고, 이에 맞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는 책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자의 가치관을 배우고 논어라는 책을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예전에 내가 논어를 시시콜콜한 도덕책이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텍스트 그 자체로 논어를 받아들이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제자들마다 달랐던 공자의 답변, 공자의 답변에 있는 숨겨진 의도들을 파악하면 논어는 결코 하나의 옳은 규범만을 설교하는 책이 아니었다. 공자는 자신만의 도덕관념 위에서 다양한 가치들을 포용하고 상대방에 맞는 답변을 하고자 했으며, 논어는 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읽는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고, 같은 사람이라도 읽을 때마다 다르게 느껴진다. 
솔직히 말하면, 강의를 듣기 전까지 난 유교를 너무나도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나는 지금껏 유교는 낡고 낡은 봉건질서를 유지하게 해 준 사상으로 생각하였고, 자신의 권력과 계층을 이용하여 일방적이고 강압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이것은 모두 ‘유교’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수업을 통해 공자와 논어를 새롭게 보기 시작했지만, ‘군군신신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유교의 대표 구절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첫 번째 구절은 신분제 사회에서 '직급에 맞는 행동이 있으니, 높은 신분의 직급을 감히 넘보지 말라'는 뜻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두 번째 구절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를 '수직적인 관계'로 보았다.

이 책은 유교는 위하여의 ‘爲’가 아니라, 더불어의 ‘與’를 추구했다고 말하며,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유교를 바로 알려주고 있다. 이러한 유교이념에 따르면, 왕은 국가의 주인으로서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왕이라는 직분에 맞게 백성을 다스리는 것일 뿐이다. 결코 사적인 권력과 욕망으로 휘두를 수는 없으며,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라는 구문도 이와 마찬가지다. 공자에게 ‘자식을 위해 행동하며, 아비라는 권위를 이용하여 자식을 가르치는 아비’는 받아들여질 수 없다. ‘아비 밑에서 나온 사람답게 아비 말을 무조건 잘 듣는 자식’또한 마찬가지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위 구문의 참 뜻이 바로 ‘군주는 신하 앞에서 군주로 존재하며, 신하는 군주 앞에서 신하로 존재하는 것일 뿐, 그 이름과 관직 앞에 폭력과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명분과 당위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 내가 저 구문을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는 유교의 ‘삼강’에 얽매여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위 인용구는 고전수업을 듣던 시절에 작성한 글이다. 당시에 7개의 글을 썼는데, 그중 논어를 접하게 된 내 소감을 적절히 표현한 문장을 발췌하였다. 약 4년 만에 다시 한번 논어를 읽으며, 감명 깊게 봤던 구절 몇 가지를 소개해본다.




1.

하지만 중요한 점은 우리가 어느 길이든 하나만 선택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그 가운데 어디에 양이 있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니 다시 여러 갈래에 서서 양을 찾으려 한들, 마음에 쏙 드는 길을 선택할 확률은 지극히 낮다.
당신이 지금 양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도 후회 마시라. 도리어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에 한 걸음 한 걸음 정성을 쏟으면, 양보다 귀한 소 한 마리가 당신의 길 끝에서 음메 하고 울고 있을 것이다.

 

  다기망양(多岐亡羊), 학문의 길이 여러 갈래이므로 진리를 찾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학문 공부를 갈림길이 많은 곳에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빗댄 것이다. 이에 대해 작가는 비록 진리를 찾는 길이 여러 갈래 일지라도 '꿋꿋이' 걷다 보면 결국 당신이 걷고 있는 그 길에 진리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학문이 존재한다. 경제학, 공학, 인문학, 사회학... 얼핏 보면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학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더 잘 사는 세상'을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
  산을 오르는 길은 다양하다. 어느 길을 선택하든 땀을 뻘뻘 쏟을 수밖에 없고 다리는 후들거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러한 시간을 인내하고 나면 머지않아 산 정상이 품고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뿐만인가? 각자의 길에서 고생해 온 사람들의 일그러진 표정, 고르지않은 숨결, 고됨이 담긴 땀방울 등... 그것들을 하나하나 공감한다면 우리 사회는 더욱 유대 있어지지 않을까?  


2.

행복은 강도가 아닌 빈도에서 찾아온다.

 

  연수원 강의 중 어느 강사분이 해주신 이야기다. '행복은 강도가 아닌 빈도에서 찾아야 해요.' 평소에도 드는 생각이지만, 나는 대단한 것에 별로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다. 비싼 호텔, 비싼 음식, 비싼 옷보단 같이 여행 간 상대방의 행복해하는 모습, 같이 맛있는 걸 먹고 감탄하는 상대방의 모습을 보며 소소한 행복을 느낀다. 이 밖에도 꼽아보자면 고양이와 같이 따스한 햇볕아래 자는 낮잠, 내가 어딜 가면 쪼르르 쫓아 나오는 고양이, 아주 명쾌한 선생님의 강연. 나에게 행복을 주는 요인은 실생활에서 쉽게 마주칠 수 있는 사소한 상황이다. 이렇게 하나 둘 나열해놓고 보니, 고양이든 사람이든 누군가와 무엇을 함께 했을 때 더한 행복을 느끼는 걸 보면 나는 생명체를 참 좋아하나 보다.
  최근 뉴스를 보면 요즘 세대는 호캉스며, 오마카세며, 명품이며 각종 사치 부리기에 여념 한다는 걱정 어린 목소리와 함께 그들을 비판하는 기사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물론 비싼 값의 지불을 통해 행복을 느낀다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이 보여주기식 행복이라면 그것이 무슨 참된 의미를 갖고 있을까. 한때는 사치 부리며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에 비해 비싼 것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날 이상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닌 빈도다. 잔잔한 호수에 돌멩이 하나가 만든 둥그런 파동이 멀리 퍼져 가듯이, 내 행복은 그렇게 널리 퍼질 것이다.


3.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에겐 연습이 필요하다.

 

  죽음의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작가는 '삶을 충실히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요즘 유난히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내 곁에 있는 사람이 건강히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 사람을 사랑하고, 철이 들어가는 것이 무슨 의민지 서서히 깨닫고 있는 것 같다. 비장애인, 이성애자인 나는 운 좋게 사회적 다수에 속해 사회의 지탄을 빗겨나간 걸지도 모른다. 내 삶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내 행복을 좇는 데 충실히 살아가야지.





마지막으로 내가 논어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 하나를 쓰고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이는 내가 해당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게 된다.